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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by alsn3519 2025. 4. 26.

대도시의 사랑법 포스터

현재, 우리는 무엇에 감동받고, 어떤 이야기에서 위로를 얻을까요? 세상이 빠르게 변해갈수록, 오히려 더 조용한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은 우리 시대의 감정과 관계를 가장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섬세한 감정선, 우정과 애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적인 관계 묘사,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감정의 온도를 세심하게 그려냅니다.

주연을 맡은 김고은과 노상현, 그리고 섬세한 감정 연출에 강점을 가진 이언희 감독의 시너지는 올해 가장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가진 감성영화를 완성해냈습니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

『대도시의 사랑법』의 시작은 아주 소박하고 조용하다. 거창한 서사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이 서울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안의 한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영화는 서서히 숨을 들이마신다. 우리 모두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는 처음 마주친다.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재희는 밝고 시끄럽고 솔직하다.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고, 세상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반면 흥수는 조용하다. 말수가 적고, 분위기에 적응하려 애쓰지만 낯선 사람들 틈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색해지는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떤 계기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까? 그건 어쩌면, 둘 다 ‘조금씩은 겉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 있긴 하지만 늘 살짝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기분, 아무리 웃어도 마음 한구석이 늘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서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막연한 고립감. 그런 감정을 서로 느끼고 있었기에, 둘은 겉으로는 다르지만 감정적으로는 묘하게 닮아 있었던 것이다.

재희는 흥수를 편견 없이 바라본다. 그러던 중, 우연히 흥수가 다르다는걸 알게 되지만, 그녀는 흥수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비밀을 ‘비밀’로 만들지 않으려 한다. “너 그냥 흥수인 거야.” 그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 흥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타인을 만났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관계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깊어진다.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밤을 지새우며 서로의 빈자리를 채운다. 그건 흔히 말하는 ‘사랑’과도, 단순한 ‘우정’과도 다르다.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감정,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연결이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재희가 흥수에게 먼저 다가가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위로하려 할 때 상대의 고통을 들으려 하지만, 재희는 다르게 접근한다. “나도 아파.” 그 고백은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방식이자, 동시에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든다. 서로의 상처를 고백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이해하려는 사람’이 아닌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

동거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도 매우 현실적이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서로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안겨주고 싶어서다. 흔히 영화에서 동거는 연애의 시작이자 로맨틱한 설렘의 상징으로 다뤄지지만, 이 영화 속 동거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공동 생존 방식’에 더 가깝다.

관객 입장에서 이 관계는 매우 낯설고, 동시에 익숙하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구인지, 연인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였던 적이 있다. 말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사람’이라고 느끼는 누군가를 떠올려본 적도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런 관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애매함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특히 서울이라는 공간이 이 관계의 배경이라는 점은 더욱 절묘하다. 사람이 많고, 불빛은 화려하며, 모두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더 짙다. 그 외로움 속에서 발견한 단 한 사람, 그와 나누는 진심 어린 교감.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된다.

결국, 이 소제목의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그건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며, 그냥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의 외로움’을 견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작은 용기이기도 하다.

캐릭터와 연기 –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진짜 얼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요소 중 하나는 캐릭터의 입체성과 현실성입니다. 재희는 표면적으로는 밝고 당당한 대학생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늘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스스로 검열하고, 주변의 평가를 신경 쓰며,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청춘의 불안이 자리합니다.

김고은은 이런 내면을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해냅니다. 밝은 대사 뒤에 숨겨진 떨리는 눈빛,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흐르는 눈물, 자신을 감추기 위해 더 세게 말하는 모습 등은 ‘감정의 결’을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연기입니다.

흥수는 더욱 복잡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성정체성 때문에 가족에게 상처를 줄까 봐 늘 말을 아끼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에도 철저하게 ‘평범한 청춘’의 모습을 연기합니다. 그러나 그 연기가 점점 그를 지치게 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가게 만듭니다.

노상현은 그런 흥수를 조용하고 묵직하게 그려냅니다. 그의 연기는 대사보다 침묵 속의 호흡, 눈빛의 떨림, 손끝의 망설임에서 감정을 전달합니다. 관객은 그를 보며 단순히 ‘성소수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어 고통받는 사람’을 공감하게 됩니다.

이언희 감독은 두 배우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 카메라를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활용합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 자취방 안 조명의 온도, 비 오는 날의 창문 등 사소한 시각적 요소들이 인물의 심리를 대변합니다. 서울의 풍경은 인물의 감정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기능하며,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사랑, 우정, 그리고 이해 – 우리가 연결되는 방식

『대도시의 사랑법』이 가장 특별한 이유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관계’의 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사랑이나 우정을 어떤 틀 안에서 정의하려 한다면, 이 영화는 정의 자체를 거부한다. 오히려 그 모호함, 불분명함,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이야말로 진짜라고 이야기한다.

재희와 흥수의 관계는 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연인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가족보다 가까운 감정을 공유한다. 그들은 친구다. 그러나 단순히 ‘친구’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것을 나눈다. 그래서 관객은 묻는다. 이건 사랑인가? 우정인가? 그 둘의 경계 어딘가인가? 그리고 영화는 대답한다. “꼭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관계의 복잡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썸, 플라토닉 러브, 절친,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공동체적 유대, 가족과도 같은 친구… 관계의 형태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그만큼 감정도 복잡해지고,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다양해진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 모든 감정을 긍정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반드시 연애일 필요는 없고, 우정이 꼭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가족이 피로만 맺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 특히 흥수의 존재는 영화 전체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늘 감정을 숨기고, 누군가에게 진심을 드러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재희라는 사람 앞에서 감정의 경계를 낮춘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연결되고, 동시에 해방된다. 재희는 그런 흥수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의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이려는 마음,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관계의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야말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래서 ‘이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서로를 100%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해하려는 마음, 그걸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해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화는 조용한 위로가 된다.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랐던 모든 외로운 마음,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던 순간, 이 영화는 그런 감정들을 낭비하지 않고, 조용히 끌어안는다.

그래서 『대도시의 사랑법』은 단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맺는 모든 관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관계는, 결국 사랑, 우정, 이해의 이름으로 완성된다.